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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증언을 추가하였다. 한편〈민속〉
편에서는 당시 집필자가 이같은 증언을 토대
로“안산시 고잔동 산18번지에는 고려시대 왕자의 태를 묻는 곳이 있었는데 이
9)
러한 연유로 이곳을 태봉이라 하였다”
는 의견을 첨부하였다.
이상과 같은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우선 태봉의 주인공은 고려시대 왕자라는
설과 시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공주라는 두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태
봉에서 출토된 유물은 태함과 비좌뿐이고 비석은 1940년경 산 아래로 굴려 버려
어느 논바닥에 묻혀 버렸고 다시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 태봉과 관련된 자료와 증
언의 전말이다.
먼저 태봉의 역사와 유래를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안태
安胎
한 사례가 없는 반면, 우리나라는《삼국사기》
에 김유신
의 태를 진주
?庾信
鎭州(지금
태령산
에 안장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일찍부터 안태했음을
의 충북 鎭川)
胎靈山
安藏
10)
알 수 있다.
또한《고려사》
에도 왕실의 안태와 관련된 자료가 나타나며 별도의
11)
태실
을 설치했음도 확인된다.
이같은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태봉
胎室
문화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조선시대 태실은 100여 개가 조사되었다.
고잔동 태봉은 고려시대 유적으로 전해 오고 있지만 이를 증명할 만한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고증이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고종대에 편찬된
34년에 문종
《안산군읍지》
의 읍명
조에“충렬왕
이 탄생한 곳이라 하
邑名
忠烈王
文宗
여 군
으로 승격시켰다”
는 기사가 있는데, 아마 이와 관련하여 고려 왕실의 태
실이 안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판단하여 전래된 얘기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문헌으로는 고려시대의 태실 기사가 확인되지만, 현재까지 고려 태
실로 알려진 유적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 태실은 어떤 구조로 갖추어
졌는지 전혀 추정할 수 없다. 오히려 고잔동 태봉의 석물 구조와 배치는 화강암
으로 태함을 제작하고 태실 비석을 세우는 것 등이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태봉 구
조와 일치하여 조선시대 태봉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태함은 초기에‘상자형’
이었다가 15세기 후반에 뚜껑인‘함개
函蓋
는 반원형, 태를 안치하던 몸체인‘함신
은 원통형으로 정착하였다. 그리고
函身
9)
안산시사편찬위원회, 《안산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함개에 돌기를 부착하였는데 이는 예술성보다는 기능성
시사》중, 1999, 631?719?
때문이었다. 즉 덮개인 함개와 몸체인 함신을 견고히 서로 묶고자 이같은 방식을
857쪽.
선택한 것이다. 태를 담는 항아리인 태호
의 덮개와 몸체를 이러한 방법으로
胎壺
10)
《삼국사기》권41, 열전 제
1, 김유신 상.
봉인하였다.
고잔동 태함은 형태와 규모로 보아 태를 안치하던 몸체인‘함신’
이 아니라 뚜
11)
《고려사》권19, 세가 제19,
명종1 등의‘태(胎)’관련
껑인‘함개’
로 파악된다. 그리고 함개 측면에 4개의 돌기가 나와 있는데 이같은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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